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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분 코스
60분 코스
Icon Image 공산성

출처 : 공주시 문화관광, 공산성 (https://www.gongju.go.kr/tour/sub01_01_02.do)

공주 공산성은 백제 웅진 도읍기(475~538년)의 왕성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성벽 축조에 사용된 판축 기법 (고운 흙과 모래 흙을 번갈아 다져서 쌓는 방법)과 벽주 건물지 (도랑을 파 기둥을 촘촘하게 세운 후 고운 흙으로 벽을 발라 만든 건물지)는 고대 중국 및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통한 백제 토목건축 기술의 발전과 전파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Icon Image 공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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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서북쪽 산마루에 있는 누각이다. 이곳에서는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금강교 (등록문화재 제232호) 등 공주의 전경을 한눈에 전망할 수 있다. 특히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금강의 낙조(落照)와 야경(夜警)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누각의 명칭은 유신대(維新臺), 전망대 등으로 불려오다가 2009년 시민들의 공모를 통해 공산정이라 지어졌다.

Icon Image 금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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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4개의 성문 가운데 서쪽에 위치한 문루이다. 성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가, 1895년에 편찬된 공산지(公山誌) 등의 문헌 기록과 동문 조사 자료 및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금서루는 비록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Icon Image 영동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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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의 4개 성문 가운데 동쪽에 설치된 문이다. 이미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80년에 발굴 조사하여 건물의 하부구조를 확인하였다. 성문의 너비는 2.5m였고, 문 옆 양쪽에서 문을 지탱하고 있던 문지석을 원래 모습대로 찾아내었다.
발굴 조사에서 얻은 자료와 1859년 (철종 10)에 편찬된 공산지(公山誌)의 기록을 바탕으로 1993년에 2층 문루로 복원하였다. 잊혀진 문루의 명칭은 2009년 시민들의 공모를 통해 영동루라고 지었다.

Icon Image 진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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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의 남문으로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이었다. 토성이었던 공산성을 조선 초기에 석정으로 다시 쌓으면서 세운 문루이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고쳐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여 원래대로 복원한 것이다. 높은 축대 위에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건물을 세워 2층 누각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Icon Image 공북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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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국 통로로 이용되었다. 1603년 (선조36)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 터에 다시 지어 공북로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아래는 성으로 통하는 통로이며 위는 마루로 만들어 강가의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건물 안에는 여러 글과 시 등이 걸려 있어 풍취를 더해 주고 있으며,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루로 평가받고 있다.

Icon Image 임류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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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백제역사유적지구 디지털아카이브 (http://archive.baekje-heritage.or.kr/)

백제 제24대 동성왕 22년 (500)에 왕궁 동쪽에 지은 건물이다. 높이가 15m에 이르는 고층으로 왕과 신하들의 연회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 공산성 발굴 조사 과정에서 임류각 터를 발견하고, 1993년에 문헌 기록 및 발굴 조사 결과를 근거로 2층 누각으로 복원하였다. 현재 임류각의 단청 문양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장신구 및 무덤방(墓室)의 벽돌에 남겨진 무늬를 많이 활용하였다.

Icon Image 명국삼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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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이듬해인 1598(선조31) 공주에 주둔하였던 명나라 세 장수 이공, 임제, 남방위의 업적을 기리는 송덕비이다. 1599년 금강 변에 세웠으나 홍수로 매몰되었고 1713년(숙종39) 다시 세웠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비석에 쓰여 있던 왜구(倭寇)라는 글자를 지우고 공주 읍사무소 뒤뜰에 묻어두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Icon Image 영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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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사는 「공산지」에 의하면 조선 세조 4년(1458)에 지은 사찰이며, 광해군 8년(1616)에는 이곳에 승장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관할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전과 강당인 관일루가 있다.

Icon Image 왕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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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긴 475년 이후에 세워진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1985~1986년에 걸친 발굴 조사에서 10칸·20칸 등의 큰 건물터와 연못 및 저장시설 등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었으며, 백제의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일부 건물터에서는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파서 기둥을 건물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Icon Image 쌍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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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4년(영조 10년)에 관찰사 이수항이 인조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을 피하여 왕이 공산성에 머물렀을 때 두 그루의 나무 밑에서 반란의 진압 소식을 기다렸다고 한다. 난이 진압되자 왕은 쌍수에 정삼품 통훈대부를 명하고, 성을 쌍수성이라 부르도록 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영조 때는 이수항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삼가정을 건립하였는데 이 건물이 쌍수정이다.

Icon Image 쌍수정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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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이괄의 난(1624)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여 세운 비이다. 비문에는 이괄의 반란, 인조가 난을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 동안의 행적, 공산성의 모습 등이 적혀 있다. 1708년(숙종34)에 세웠으며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 위에 세우고, 목조 건축의 지붕을 모방한 머릿돌을 갖춘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이다.

Icon Image 만하루, 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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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 BY[저작권정보 표시] 공산성|한국저작권위원회

만하루는 조선 영조(1724~1776) 대에 건립된 누각이다. 연못과 금강 사이에 자리 잡은 누각은 공산성을 방어하는 군사적 기능과 평소 경치를 관람하는 역할을 한다.

연지는 금강 가까이에서 물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지형상의 조건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연못의 가장자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돌로 층단을 쌓았으며, 수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북쪽과 남쪽에 계단 시설을 하였다.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이다.

Icon Image 광복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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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있는 2층 누락으로, 공산성 안에 주둔한 군대를 지휘하던 중군영(中軍營)의 문이었다. 원래 공산성의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던 것을 일제 강점기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웅심각(雄心閣)으로 불렀는데, 1946년 4월에 김구 선생과 이시영 선생이 와서 나라를 다시 찾았음을 기리고자 광복(光復)이란 이름을 붙이게 됨으로써 누각 명칭이 광복루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북루
금서루
광복루
임류각
진남루
만하루, 연지
명국삼장비
공산정
쌍수정
쌍수정 사적비
왕궁지
영동루
영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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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공산성

본 지역은 2021.07.22~2021.07.27에 촬영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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